제제 (이태준 선생님의 문장강화중)
현실, 인생과 자연, 그 속에서 제재를 찾는 데는 먼저 자기의 태도가 중요하다.
염세적인 우울한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암담한 제재만 보일 것이요, 몽상적인 낙천의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명랑한 제재만 뜨일 것이다.
자기의 철학적인 지반이 확호부동하게 닦인 후에는 자기의 인생관이나 자연관에서 주저할 것이 없겠지만, 아직 그 전 단계에 있는 사람으로는 밝거나 어두운 어느 한 극단으로 치우쳐서 제재를 취해서는 안 된다.
슬픔도 너무 크면 울음이 나오지 않는다.
기쁨도 너무 크면 말이 막힌다.
심각한 것일수록 첫솜씨엔 부적당하다.
제재는 진기해야만 쓰는 것은 아니다.
뉴스재료와는 다르다.
아무리 평범한 데서라도 자기의 촉각으로 느끼기에 달린 것이다.
- 낮닭 우는 소리가 무던히 한가롭다. 어제도 울던 낮닭이 오늘도 또 울었다는 외에 아무 흥미도 없다.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다. 다만 우연히 귀에 들려왔으니까 그저 들었달 뿐이다.
닭은 그래도 새벽, 낮으로 울기나 한다. 그러나 이 동리의 개들은 짖지를 않는다. 그러면 모두 벙어리 개들인가? 아니다. 그 증거로는 이 동리 사람 아닌 내가 돌팔매질을 하면서 위협하면 십 리나 달아나면서 나를 돌아다보고 짖는다.
그렇건만 내가 아무 그런 위험한 짓을 하지 않고 지나가면 천 리나 먼 데서 온 외인, 더구나 안면이 이처럼 창백하고 봉발이 작소를 이룬 기이한 풍모를 쳐다보면서도 짖지 않는다. 참 이상하다. 어째서 여기 개들은 나를 보고 짖지를 않을까? 세상에도 희귀한 겸소한 겁쟁이 개들도 다 많다.
이 겁쟁이 개들은 이런 나를 보고도 짖지를 않으니 그럼 대체 무엇을 보아야 짖으랴?
그들은 짖을 일이 없다. 여인은 이곳에 오지 않는다. 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국도 연변에 있지 않은 이 촌락을 그들은 지나갈 일도 없다. 가끔 이웃마을의 김서방이 온다. 그러나 그는 여기 최서방과 똑같은 복장과 피부색과 사투리를 가졌으니 개들이 짖어 무엇하랴. 이 빈촌에는 도적이 없다. 인정 있는 도적이면 여기 너무나 빈한한 새악시들을 위해여 훔친 바 비녀나 반지를 가만히 놓고 가지 않으면 안되리라. 도적에게는 이 마을은 도적의 도심을 도적맞기 위한 위험한 지대리라.
그러니 실로 개들이 무엇을 보고 짖으랴. 개들은 너무나 오랫동안-아마 그 출생 당시부터- 짖는 버릇을 포기한 채 지내왔다. 몇 대를 두고 짖지 않는 이곳 견족들은 드디어 짖는다는 본능을 상실하고 만 것이리라. 인제는 돌이나 나무토막으로 얻어맞아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파야 겨우 짖는다. 그러나 그와 같은 본능은 인간에게도 있으니 특히 개의 특징으로 쳐들 것은 못되리라.
개들은 대개 제가 길리우고 있는 집 문간에 가 앉아서 밤이면 밤잠 낮이면 낮잠을 잔다. 왜? 그들은 수위할 아무 대상도 없으니까다.
최서방네 집 개가 이리로 온다. 그것을 김서방네 집 개가 발견하고 일어나서 영접한다. 그러나 영접해본댔자 할 일이 없다. 양구에 그들은 헤어진다.
설레설레 길으 걸어본다. 밤낮 다니던 길, 그 길에는 아무것도 떨어진 것이 없다. 촌민들은 한여름 보리와 조를 먹는다. 반찬은 날된장 풋고추다. 그러니 그들의 부엌에조차 남는 것이 없겠거늘 하물며 길가에 무엇이 족히 떨어져 있을 수 있으랴.
길을 걸어본댔자 소득이 없다. 낮잠이나 자자. 그리하여 개들은 천부의 수위술을 망각하고 낮잠에 탐닉하여버리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타락하고 말았다.
슬픈 일이다. 짖을 줄 모르는 벙어리 개, 지킬 줄 모르는 게으름뱅이 개, 이 바보 개들은 복날 개장국을 끓여 먹기 위하여 촌민의 희생이 된다. 그러나 불쌍한 개들은 음력도 모르니 복날은 몇 날이나 남았나 전연 알 길이 없다.
- 이상의 권태-
제재가 재미있어야 재미있고, 제재가 슬퍼야 슬플 수 있는 것은 신문기사뿐이다.
신문의 문장이 아니라 사람의, 개인의 개성이 담긴 문장이란 제재가 반드시 슬퍼야 슬프고, 제재가 반드시 즐거워야 즐겁고, 제재가 반드시 굉장해야 굉장한 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요점은 자기가 관찰하고 느끼기에 달린 것이다. 그러니까 더욱 요점은 자기가 넉넉히 느낄 수 있는, 요리할 수 있는, 제 힘에 만만한 것으로 택하는 것이 상책이다.
한 알 씨앗에서 싹이 트고 가지가 뻗고 꽃이 피듯, '귀뚜라미'란 제목에서 시작해 세상의 가을을 향해 번져나가는 글이라야지, 허턱 '가을'이라고 대담하게 제목을 붙였다가 '귀뚜라미'로 쫄아드는 글은 소담스럽지 못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