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 퇴고의 실제 - 이태준 선생님의 문장강화중
예문)
교문을 나선 제복의 두 처녀, 짧은 세일러복 밑에 쭉 곧은 두 다리의 각선미, 참으로 씩씩하고 힘차 보인다.
지금 마악 운동을 하다 돌아옴인지, 이마의 땀을 씻는다.
얼굴은 흥분하여 익은 능금빛 같고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웃음을 가득 담은 얼굴은 참으로 기쁘고 명랑해 보인다.
1. 용어를 보자.
'각선미' '흥분'은 가당치 않다.배우나 성숙한 여인의 아니요, 아직 쎄일러복을 입은 중학생에겐 설혹 다리가 곱더라도 '제법 각선미가 나타나는..'정도로는 쓸지언정, 결정적으로 '각선미'라고 지정해 쓰는 건 과장. 또 감정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육체적으로 운동을 해서 이글이글해진 얼굴을 '흥분'으로 부르는 것도 오진이다. '흥분'은 감정 편을 더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또 무의미한, 겹치는 말이 있다.
'씩씩하고 힘차'는 거의 같은 말. 그 중에 어느 하나는 무의미한 것이요, '참으로 씩씩하고...' '참으로 기쁘고...'에서 부사 '참으로'도 겹치는 말이다. 어느 하나는 '퍽'으로라도 고쳐야 할 것이다. '씩씩해 보인다' '명랑해 보인다'의 '보인다'도, '돌아옴인지' '즐거운지'의 '지'도 자꾸 쓰였다. '얼굴은 흥분하여' '웃음을 가득 담은 얼굴은'에 '얼굴은'도 하나는 무의미라기보다 도리어 같은 주어가 두 번씩 나오기 때문에 글 뜻을 혼란시킨다. 둘 중 하나씩은 고치고 없애야 한다.
- 교문을 나선 제복의 두 처녀, 짧은 세일러복 밑에 쭉 곧은 두 다리, 퍽 씩씩하다. 지금 마악 운동을 하다 돌아옴인 듯, 이마의 땀을 씻는다. 얼굴은 상기되어 익은 능금빛 같고,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웃음을 가득 담아 참으로 기쁘고 명랑해 보인다. -
2. 모순인 곳과 오해될 데가 없나 보자.
'두 처녀'와 '두 다리'가 맞지 않는다. 다리가 하나씩밖에 없는 처녀들이 된다. 그렇다고 '네 다리'라 하면 너무 산술적. 그러니까 둘이니 넷이니 할 것이 아니라 그냥 '다리들'하면 될 것이요, 또 '교문을 나선'이란 말도 오해되기 쉬운 말. 수업 후의 하교로보다 '졸어'을 연상시키는 말이기 때문. 그런데 첫머리의 '교문을 나선'은 명사나 동사를 바꿔놓는 것으로 얼른 고쳐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교문을 나선'이란 말에서 '졸업'이란 추상성을 없애기 위해선 '교문'과 나서는 학생들의 모양과 '제복'을 좀 더 현실감 나게 묘사할 필요가 있다.
- 흰 돌기둥이 교문을 나선 푸른 쎄일러복의 두 처녀, 짧은 스커트 밑에 쭉 곧은 다리들, 퍽 씩씩하다.
지금 마악 운동을 하다 돌아옴인 듯, 이마의 땀을 씻는다.
얼굴은 상기되어 익은 능금빛 같고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웃음을 가득 담아 참으로 기쁘고 명랑해 보인다.
3. 인상이 선명한가, 어지럽게 하는 데가 없나 보자.
교문을 '나온' 이 아니라 '나선'이요, 얼굴을 먼저 말한 것이 아니라 '쭉 곧은 두 다리'를 말했다. 확실히 뒤에서 보는 인상이다.
독자는 저쪽으로 사라져가는 두 여학생을 머릿속에 그리며 내려가는데, 갑자기 '돌아옴인 듯'이란 앞을 향한 듯한 인상의 말이 나왔다.
어지러게 된다.
- 흰 돌기둥의 교문을 나선 푸른 쎄일러복의 두 처녀, 짧은 스커트 밑에 쭉 곧은 다리들, 퍽 씩씩하다.
지금 마악 운동을 하다 나선 듯, 이마의 땀을 씻는다.
얼굴들은 상기되어 익은 능금빛 같고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웃음을 가득 담아 참으로 기쁘고 명랑해 보인다
이렇게 하고도 어지러운 데가 하나 남는다. 동작들이 모호한 것이다. '쭉 곧은 다리들'에서는 돌아선 뒷모양이 느껴지고
'씩씩하다'에서는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고 활발히 움직이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두 여학생이 가볍고도 또박또박한 걸음으로 돌아서 가는 모양이 독자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런데 '이마의 땀을 씻는다, 얼굴들은'에서부터는 앞에서 보는 듯한 설명이다.
여기에 이 글의 대수술을 면치 못할 운명이 있다.
가) 저쪽으로 사라지는 경우
- 흰 돌기둥의 교문을 나선 푸른 쎄일러복의 두 처녀, 짧은 스커트 밑에 쭉 곧은 다리들, 퍽 씩씩하게 걸어간다.
지금 마악 운동을 하다 나선 듯, 가방을 들지 않은 다른 팔들로는 그저 뻗었다 굽혔다 해보면서, 그 팔로 땀들을 씻음인지 이마를 문지르기도 한다. 귀까지 새빨간 꽃송이처럼 피어가지고 골목이 온통 왁자하게 떠들며 간다.
나) 이쪽으로 오는 경우
- 흰 돌기둥의 교문을 나선 푸른 쎄일러복의 두 처녀, 얼굴이 모두 익은 능금빛처럼 이글이글하다.
지금 마악 운동을 하다 나선 듯, 이마의 땀을 씻으며 그저 숨찬 어조로 웃음 반, 말 반 떠들며 온다.
짧은 스커트 밑에 쭉 쭉 뻗어나오는 곧은 다리들, 누구에게나 퍽 힘차고 경쾌해 보인다.
4. 될 수 있는 대로 줄이자.
있어도 괜찮을 말을 두는 너그러움보다, 없어도 좋을 말을 기어이 찾아내어 없애는 신경질이 글쓰기에선 미덕이 된다.
이 없어도 좋을 말들을 다 뽑아버려 보라. 잡초를 뽑은 꽃 이랑처럼 한결 맑은 기운이 풍길 것이다.
가) 저쪽으로 사라지는 경우
- 흰 돌기둥의 교문을 나선 푸른 쎄일러복의 두 처녀, 짧은 스커트 밑에 쭉 곧은 다리들, 퍽 씩씩하게 걸어간다.
마악 운동을 하다 나선 듯, 가방을 들지 않은 팔들로는 그저 뻗었다 굽혔다 해보면서, 땀들을 씻음인지 이마를 문지르기도 한다. 귀까지 꽃송이처럼 피어가지고 골목이 왁자하게 떠들며 간다.
나) 이쪽으로 오는 경우
- 흰 돌기둥의 교문을 나선 푸른 쎄일러복의 두 처녀, 얼굴이 모두 능금처럼 이글이글하다.
마악 운동을 하다 나오는 듯, 이마의 땀을 씻으며 그저 숨찬 어조로 웃음 반, 말 반 떠들며 온다.
짧은 스커트 밑에 쭉 쭉 뻗어나오는 곧은 다리들, 퍽 힘차고 경쾌해 보인다
5. 처음의 것이 있나? 없나?
글만 자꾸 고쳐나가다가는 글보다 귀한 것을 잃어버리는 수가 있다. '처음의 것'이란 처음의 글이 아니다.
'처음의 생각'과 '처음의 신선함'을 가리킴이다.
백번이라도 고치되 끝까지 구기지 말고 지녀나가야 할 것은 이 '처음의 생각'과 '처음의 신선함'이다.
이 처음의 것을 이지러뜨릴 염려가 없게 하기 위해서는
- 그 글을 처음 썼을 때의 생각과 기분을 자기 자신에게 선명히 기억시킬 것.
- 중얼거리며 고치지 말 것. 그렇게 하다가는 뜻에는 날카롭지 못하고 음조에만 끌리어 개념적인 수사에 빠지기 쉽다.
- 앉은 자리에서 자꾸 고치지 말 것. 여러 날만에, 남의 글처럼 낯설어진 때에 고치는 것이 이상적이다.
6. 이 표현에 만족할 수 있나? 없나?
이것으로 내 자신이 만족한가. 한번 따지고 내놓는 것이라야 한 줄의 글이라도 비로소 '자기의 표현'이라 내세울 수 있을 것이다.